주말마다 정상 인증샷을 찍어야 직성이 풀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등산복부터 등산화까지 브랜드를 맞추고, 몇 분 만에 올라갔는지 기록까지 재던 시절이었습니다. 뉴질랜드에 이민 온 지 10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저를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납니다. 여기서는 걷기가 그런 게 아니거든요.

구멍 난 티셔츠로 걷는 사람들 — 부시워크 문화의 민낯
처음 동네 트랙에 나갔을 때 제가 받은 첫인상은 솔직히 좀 황당했습니다. 한국에서라면 절대 밖에 못 입을 것 같은 낡은 반바지 차림의 사람들이 아주 태연하게 숲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맨발로 걷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에는 가난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동네에서 꽤 잘나가는 건축가였습니다.
키위들이 즐기는 부시워크(Bush Walk)는, 말 그대로 덤불숲을 걷는 행위입니다. 쉽게 말해 정비된 등산로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숲길을 걷는 것입니다. 장비를 갖추고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개념이 아니라, 흙의 감촉을 발바닥으로 느끼고 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 자체가 목적입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컸습니다. 한국에서 등산은 언제나 무언가를 향해 가는 행위였는데, 뉴질랜드의 부시워크는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어릴 때부터 유치원에서부터 숲에 데려가 진흙탕에 뒹굴게 하는 나라이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40대인 제가 낑낑대며 오르는 경사로를 대여섯 살짜리 아이들이 콧노래를 부르며 올라가는 장면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경이롭습니다.
할아버지가 알려준 것 — 트랙워킹은 삶 그 자체
이민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동네 트랙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80세는 족히 돼 보이는 분이었는데, 낡은 지팡이 하나를 짚고 아주 천천히, 그러나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숲을 걷고 계셨습니다. 제가 "힘들지 않으세요?"라고 여쭤봤더니 그분이 웃으며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습니다.
"I'm not hiking, I'm just living."
하이킹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사는 중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한 문장이 제가 걷기를 바라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놨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등산' 대신 '걷기'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뉴질랜드의 주말 트랙워킹(Track Walking) 문화를 이해하려면, 이것이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사교의 장이라는 걸 먼저 알아야 합니다. 트랙워킹이란 국가가 관리하는 지정 트랙(Track)을 따라 걷는 활동으로, 한국의 둘레길 문화와 비슷하지만 그 규모와 생태적 의미가 훨씬 큽니다. 친구들이 카페 대신 트랙 입구에서 만나 텀블러를 손에 들고 한 시간, 두 시간을 걸으며 한 주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제 경험상 이 방식이 카페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솔직한 대화를 이끌어냅니다. 걸으면서 하는 대화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 괜히 말문이 더 잘 열리는 것 같습니다. 뉴질랜드에 살면서 가장 좋아하게 된 습관 중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신발 세척 스테이션 앞에서 배운 것 — 자연 에티켓의 진심
뉴질랜드 트랙 입구에 가면 커다란 솔과 물이 담긴 세척 시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는데, 현지 친구가 제 팔을 잡아당기며 신발을 닦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이오시큐리티(Biosecurity) 절차입니다. 바이오시큐리티란 외래 생물, 병원균, 오염 물질 등이 특정 생태계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는 일련의 예방 조치를 뜻합니다.
뉴질랜드에서 이 절차가 특히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카우리 다이백(Kauri Dieback)이라는 토양 매개 병균 때문입니다. 카우리 다이백이란 뉴질랜드 고유의 카우리 나무(Kauri Tree)를 고사시키는 수 병원성 난균으로, 등산객의 신발 밑창에 묻은 흙을 통해 순식간에 퍼질 수 있습니다. 한 번 감염된 카우리 나무는 현재 치료 방법이 없습니다. 뉴질랜드 환경보전부(DOC, Department of Conservation)에 따르면 카우리 다이백은 현재 뉴질랜드 북부 지역 전체로 확산 중이며, 예방만이 유일한 대책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출처: 뉴질랜드 환경보전부(DOC)).
뉴질랜드의 자연 에티켓은 '흔적 남기지 않기', 즉 LNT(Leave No Trace) 원칙을 기반으로 합니다. LNT란 자연에 들어간 인간이 방문 이전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도록 하는 야외 활동 윤리 체계입니다. 쓰레기를 가져오지 않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지정된 경로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것, 채집을 하지 않는 것,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뉴질랜드 트랙에서 현지인들이 실천하는 자연 에티켓 핵심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 트랙 입구의 신발 세척 스테이션에서 반드시 신발 바닥을 닦는다
- 지정 경로(Designated Track) 외 구역은 절대 밟지 않는다
- 반려견 동반 가능 구역(Dog Friendly Track)에서도 배설물 수거와 리드줄 착용은 필수다
- 마주치는 사람에게 "Hello" 또는 "Morning"으로 가볍게 인사한다
- 쓰레기는 모두 다시 가져간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등산할 때 트랙 에티켓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지키는 문화는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귀찮음을 이겨내고 신발을 닦는 그 작은 행동 하나가, 수백 년 된 나무를 지키는 일이라는 걸 뉴질랜드에서 처음 이해했습니다.
은퇴한 노부부가 잡초를 뽑는 이유 — 공동체가 가꾸는 길
뉴질랜드 트랙 곳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을 만납니다. 제가 처음 봤을 때는 공원 관리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근처에 사는 은퇴한 부부였습니다. 매주 몇 시간씩 나와서 잡초를 뽑고, 무너진 돌계단을 고치고, 안내판을 닦는다고 했습니다. 왜 하냐고 물었더니 "We walk here, so we fix here(우리가 여기를 걷는 사람들이니, 우리가 고치는 거지)"라고 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걷기를 가장 접근성이 높고 지속 가능한 신체 활동으로 권고하며, 성인 기준 주당 150분 이상의 중등도 신체 활동을 권장하고 있습니다(출처: 세계보건기구(WHO)). 뉴질랜드 현지인들은 이 권고를 '운동 목표'로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채우고 있습니다. 억지로 운동 시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상 자체가 걷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40대 중반을 넘어선 지금, 저의 주말은 현지 친구들과 함께 동네 트랙을 걸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채워집니다. 특별한 목적지도, 무거운 장비도 필요 없습니다. 은퇴한 노부부가 묵묵히 잡초를 뽑는 그 트랙을 걸을 때마다, 이 길은 누군가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뉴질랜드에서 걷기가 단순한 운동이 아닌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10년 전 정복욕을 버리고 뉴질랜드 방식의 걷기를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숲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빠르게 오르는 것보다 천천히 느끼는 것, 기록을 남기는 것보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걸 트랙 위에서 배웠습니다. 뉴질랜드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유명 관광지 하나를 빼더라도 동네 트랙을 한 시간만 걸어보시길 권합니다. 편안한 운동화 하나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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