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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걷기 여행

뉴질랜드 시티 트레킹 (화산구, 워킹 트랙, 뷰포인트)

by 트래킹 마스터 2026. 5. 3.

 

뉴질랜드 스카이타워와 하버브릿지 사진

 

뉴질랜드 도시 한복판에서 15분만 걸으면 숲이 나옵니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저도 반신반의했습니다. 한국에서 매주 관악산을 탔던 사람이 "도심 산책으로 뭘 얻겠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오클랜드 마운트 이든 분화구 벤치에 앉아 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 날, 그 편견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화산구 위에 도시가 생긴다는 것의 의미

오클랜드는 화산 지형(volcanic field)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화산 지형이란 과거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분화구, 용암 대지, 스코리아 언덕 등이 지표에 그대로 남아 있는 지형을 뜻합니다. 오클랜드 도심 안에만 그런 화산구가 50여 개에 달하는데, 마운트 이든(Mt Eden)은 그 중 가장 높은 해발 196m 지점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대단한 트레킹이냐"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실제로 올라가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정상에 서는 순간, 발밑으로 지름 50m짜리 초록 분화구가 내려다보이고, 고개를 들면 스카이타워와 와이테마타(Waitemata) 항구가 파노라마로 펼쳐집니다. 와이테마타란 마오리어로 '반짝이는 바다'를 뜻하며, 오클랜드 도심 북쪽에 맞닿은 항구 이름입니다.

해 질 녘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도시 불빛이 하나씩 켜지는 그 순간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입장료도 없고, 운동화만 있으면 됩니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현지인들이 강아지를 끌고, 조깅을 하며 오르는 그 일상적인 풍경 자체가 뉴질랜드입니다. '관광지'가 아니라 '동네 뒷산'인 셈이죠.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마운트 이든 정상부는 마오리 문화에서 성지(sacred site)로 여겨집니다. 성지란 특정 민족이나 종교 공동체가 신성하게 여기는 장소를 뜻하며, 분화구 안으로 내려가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현지에서는 이를 어기는 관광객으로 인한 훼손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워킹 트랙 인프라, 정말 한국과 다른가

뉴질랜드 도시의 워킹 트랙(walking track)은 도보 여행자를 위해 조성된 공식 산책로 네트워크를 말합니다. 단순한 흙길이 아니라 표지판, 안전 울타리, 응급 연락처까지 갖춘 체계적인 인프라입니다. 뉴질랜드 정부는 도시 개발 인허가 과정에서 워킹 트랙 확보를 법적으로 의무화하고 있으며, 웰링턴은 전 세계 보행자 친화 도시 평가에서 최상위권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출처: Wellington NZ 공식 사이트)

그런데 이게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급증하는 관광객으로 인해 트랙 훼손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현지 미디어에서도 일부 도심 외곽 산책로의 야간 조명 부족과 치안 문제를 꾸준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도 퀸스타운 힐(Queenstown Hill)을 오후 늦게 올랐다가 하산 시 조명이 없는 구간에서 꽤 당황한 경험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일몰 전 트래킹 종료를 권고합니다. 저도 이 점에는 완전히 동의합니다. 특히 40대 여행자라면 체력 안배뿐 아니라 안전 마진(safety margin)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안전 마진이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해 시간이나 에너지를 여유 있게 남겨두는 전략입니다. 아름다운 곳일수록 방심하기 쉽다는 것, 뉴질랜드도 예외가 아닙니다.

현지에서 제가 체감한 한국과의 가장 큰 차이는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 등산로는 이정표가 과잉일 정도로 많고, 안내 방송도 나오고, 심지어 금지 구역을 막는 펜스까지 촘촘합니다. 뉴질랜드 트랙은 기본적인 표지만 있고, 나머지는 이용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이게 자유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무책임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뷰포인트 3곳, 어디가 진짜 다른가

뉴질랜드 도시 트레킹을 대표하는 뷰포인트(viewpoint), 즉 탁 트인 전망을 확보할 수 있는 지점 세 곳을 저는 모두 직접 걸어봤습니다. 비교해보면 각각이 완전히 다른 경험을 줍니다.

  1. 마운트 이든(오클랜드): 화산 분화구와 도시 스카이라인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유일한 지점. 왕복 1시간 이내, 포장도로 혼합 코스로 접근성이 가장 좋습니다.
  2. 퀸스타운 힐: 시내 중심가에서 도보로 바로 진입 가능하며, 왕복 약 1.5~2시간 소요. 와카티푸(Wakatipu) 호수와 리마커블스(Remarkables) 산맥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꿈의 바구니(Basket of Dreams)' 조형물이 포토 스팟으로 유명합니다.
  3. 마운트 빅토리아(웰링턴):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면 오리엔탈 베이(Oriental Bay)와 항구가 펼쳐집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어 걷는 내내 묘한 기분이 듭니다.

세 곳 모두 운동화로 충분히 오를 수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제 경험상 퀸스타운 힐이 체력 소모 대비 만족도가 가장 높았습니다. 경사가 있어서 '걸었다'는 성취감이 남고,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호수 색깔이 말 그대로 비현실적입니다. 반면 마운트 빅토리아는 바람이 정말 강합니다. '바람의 도시'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님을 온몸으로 확인했습니다.

뉴질랜드 정부 공식 여행 정보 포털에서도 이 세 곳을 도심 접근 가능 트레킹 코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출처: Tourism New Zealand 공식 사이트) 코스 난이도, 소요 시간, 주차 정보 등을 출발 전에 미리 확인해두면 당일 동선을 짜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도시 걷기를 여행 일정에 넣는 방법

많은 분들이 뉴질랜드 여행 일정을 짤 때 도시를 그냥 지나치는 거점으로만 씁니다. 오클랜드에서 하룻밤 자고 퀸스타운으로 이동, 이런 식으로요.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건 꽤 아까운 선택입니다.

제가 권하는 방식은 숙소를 트랙 입구 근처로 잡는 것입니다. 렌터카 주차 걱정 없이, 조식 후 운동화만 신고 바로 출발할 수 있는 동선이 여행 피로도를 확연히 낮춰줍니다. 오클랜드의 경우 마운트 이든 주변에 에어비앤비나 소규모 게스트하우스가 많고, 대중교통 접근성도 좋습니다.

시간대 선택도 중요합니다. 오전 11시에서 오후 3시 사이는 관광객이 가장 몰리는 피크 타임(peak time)입니다. 피크 타임이란 특정 장소나 서비스에 이용자가 최대로 집중되는 시간대를 뜻합니다. 이 시간을 피해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에 오르면 사진도 더 잘 나오고, 진짜 현지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주로 이른 아침을 선호하는데, 안개가 깔린 분화구를 보는 경험은 낮 시간대와 완전히 다릅니다.

하산 후 동선도 미리 생각해두면 좋습니다. 퀸스타운 힐 하산 길에는 로컬 카페들이 있고, 웰링턴 마운트 빅토리아 아래로는 오리엔탈 베이 맛집 거리가 이어집니다. 걷기를 식사나 쇼핑과 연결하면 일정 효율이 올라가고, 무엇보다 '산책만 하고 끝났다'는 허전함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기록과 정상을 향해 달리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 제가 뉴질랜드에서 즐기는 시티 트레킹은 완전히 다른 활동처럼 느껴집니다. 더 짧고, 더 느리고, 더 가볍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뉴질랜드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유명 스팟 체크리스트를 잠깐 내려놓고 도시 안에서 한 시간짜리 여백을 일정에 먼저 넣어보시길 권합니다. 등산화 없이, 계획 없이, 그냥 걸어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