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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걷기 여행

와이헤케 섬 트래킹 (페리 여행, 해안 절경, 포도밭 풍경)

by 트래킹 마스터 2026. 5. 19.

솔직히 처음엔 와이헤케 섬을 그냥 와인 마시러 가는 곳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오클랜드 도심에서 페리로 40분이면 닿는 섬인데, 사진마다 포도밭이 나오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요. 그런데 직접 몇 번 다녀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이 섬은 걷는 사람 따로, 와인 마시는 사람 따로 있다는 걸. 그리고 저는 걷는 쪽이었습니다.

 

와이헤케 섬 트래킹

페리 여행 : 페리 위에서 이미 절반은 힐링이 된다

뉴질랜드 생활이 몇 년 넘어가면 이상한 감정이 생깁니다. 한국보다 느리고 여유롭다고 다들 말하는데, 막상 살아보면 그 안에도 나름의 피로가 쌓이거든요. 일과 집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몸보다 마음이 먼저 무거워집니다. 그럴 때 저는 페리를 탑니다.

오클랜드 Downtown Ferry Terminal에서 Fullers360 페리에 오르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Fullers360은 와이헤케 섬을 운항하는 주요 페리 운항사로, 시간대별로 다양한 편을 운행하고 있습니다. 갑판에 서서 오클랜드 스카이라인이 천천히 멀어지는 걸 보고 있으면 이미 머릿속 소음이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 납니다.

한 가지 예상 밖이었던 건 바람 세기였습니다. 뉴질랜드 바람은 습기를 머금고 있어서 체온을 생각보다 빨리 빼앗아 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윈드 칠(Wind Chill)이라는 개념입니다. 윈드 칠이란 실제 기온보다 바람 때문에 체감하는 온도가 더 낮아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뉴질랜드 사람들이 날씨 앱에서 기온보다 Wind Chill 수치를 먼저 확인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름에도 갑판에서는 얇은 바람막이가 필수입니다.

도착지는 Matiatia Wharf입니다. 배에서 내리면 언덕 위로 포도밭이 보이고, 길가에는 올리브 나무와 야생 풀이 뒤섞여 있습니다. 오클랜드 도심의 회색빛과는 완전히 다른 색감이라 잠깐 멍하게 서 있게 됩니다. 저는 이 첫 순간이 좋아서 일부러 아침 첫 배를 자주 타는 편입니다.

해안 절경 따라 걷다 보면 시간 감각이 사라진다

와이헤케 섬에서 해안을 따라 걷는 트래킹 코스를 코스탈 워크(Coastal Walk)라고 부릅니다. 코스탈 워크란 해안 지형을 따라 이어지는 트래킹 루트를 의미하는데, 단순히 바다를 구경하는 수준이 아니라 절벽, 숲, 조수 웅덩이를 모두 통과하는 경험입니다. 제가 가장 자주 걷는 건 Church Bay 방향에서 Oneroa로 이어지는 해안길과, Onetangi에서 Palm Beach까지 연결되는 루트입니다.

Church Bay 코스는 풍경이 계속 바뀌는 게 매력입니다. 포도밭이 나왔다가 원시림 같은 숲길로 바뀌고, 갑자기 절벽 아래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집니다. 아침 햇빛이 바다 표면에 반사되면서 은빛으로 흔들리는 장면은 솔직히 카메라로 제대로 담기가 어렵습니다. 눈으로 봐야 하는 종류의 풍경입니다.

Onetangi 쪽은 분위기가 조금 다릅니다. 관광객보다 현지 주민 비율이 높고, 걷는 사람들의 속도 자체가 천천히입니다. 누군가는 개를 데리고 걷고, 누군가는 바위에 앉아 책을 읽습니다. 저도 이 코스에서는 이어폰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파도 소리가 계속 리듬처럼 깔려 있어서 따로 음악이 필요 없거든요.

이 코스에서 꼭 살펴봤으면 하는 게 타이달 풀(Tidal Pool)입니다. 타이달 풀이란 썰물 때 바위 사이에 바닷물이 고여서 형성되는 작은 해양 생태계를 말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은 게, 조개류, 어린 물고기들이 움직이는 게 보이는데, 이게 생각보다 오래 보게 됩니다. 뉴질랜드 환경보전부(DOC)에 따르면 와이헤케 섬 일대 해안은 다양한 해양 생물의 서식지로 보호 관리되고 있습니다(출처: 뉴질랜드 환경보전부 DOC).

길 위에서 자주 만나는 나무 중에 포후투카와(Pohutukawa)가 있습니다. 포후투카와는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해안 수종으로, 12월 여름 크리스마스 시즌에 붉은 꽃이 피어 뉴질랜드 크리스마스 트리(New Zealand Christmas Tree)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절벽 가까이 자라는 경우가 많아 바람 방향에 따라 나무 형태가 독특하게 휘어 있는데, 그 모양 자체가 하나의 풍경입니다.

트래킹 전에 꼭 확인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타이드 타임(Tide Time), 즉 조수 간만 시간입니다. 일부 해안 구간은 밀물 때 접근이 어렵거나 아예 막히기도 합니다. 뉴질랜드 현지인들은 해안 산책 전에 조수 예보 앱을 따로 확인하는 게 습관처럼 되어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갔다가 길이 잠긴 구간을 만나고 나서부터 꼭 확인하게 됐습니다(출처: MetService 호라키 걸프 해양 예보).

트래킹을 준비하신다면 아래 항목은 꼭 챙기시길 권합니다.

  1. 가벼운 바람막이 (여름에도 필수. 해안 바람이 생각보다 강합니다)
  2. 방수 가능한 운동화 (비 온 다음 날 진흙 구간이 꽤 미끄럽습니다)
  3. 자외선 차단제 (뉴질랜드 UV 지수는 흐린 날에도 높습니다. 바다 반사광이 더해지면 더합니다)
  4. 충분한 물 (카페나 편의시설이 없는 구간이 길게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5. 조수 예보 앱 확인 (해안 구간 트래킹 전 필수 확인 사항입니다)

포도밭 풍경 사이에서 걷는 시간이 진짜 와이헤케다

많은 분들이 와이헤케 하면 와이너리 투어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게 틀린 건 아닙니다. 실제로 와이헤케 섬은 뉴질랜드에서 손꼽히는 프리미엄 와인 산지이고, 섬 곳곳에 크고 작은 와이너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와이너리에서 와인을 마시는 순간보다 와이너리 사이 언덕길을 걸을 때가 더 기억에 남습니다.

포도나무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늦은 오후 빛이 언덕 표면에 길게 내려앉는 분위기, 그리고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갑자기 차가워지는 공기까지. 이런 감각들이 쌓여서 나중에 와이헤케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올라오는 장면이 됩니다.

트래킹을 끝내고 Oneroa Village 쪽 카페에 들어가는 것도 이 섬에서 제가 좋아하는 루틴입니다. 창가에 앉아 바다 쪽을 바라보며 뉴질랜드 플랫 화이트(Flat White)를 마시는 시간인데요. 플랫 화이트란 에스프레소에 스팀 우유를 적게 넣어 커피 맛이 더 진하게 느껴지는 뉴질랜드식 커피 음료입니다. 한국 카페 라떼와 비슷하지만 우유 거품이 얇고 커피 풍미가 강합니다. 바닷바람 맞고 걷다 들어와서 마시면 이게 이상하게 잘 어울립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돌아오는 페리를 탑니다. 저녁 배에서 오클랜드 야경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면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이 드는데, 동시에 마음 한쪽은 분명히 조금 가벼워져 있습니다. 앞으로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 뉴질랜드에 계속 남을 건지 같은 무거운 질문들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 무게가 잠깐 멀어지는 느낌은 있습니다. 와이헤케 섬이 저한테 그런 역할을 해줍니다.

와이헤케 섬은 하루짜리 여행지로도 충분하지만, 한번 다녀오면 두 번, 세 번 다시 가게 되는 곳입니다. 관광 명소를 빠르게 돌아보는 스타일이라면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걷는 걸 좋아하거나, 그냥 잠깐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만한 곳이 없습니다. 오클랜드에 계신다면 한번쯤 아침 첫 페리를 타보시길 권합니다. 갑판에서 Rangitoto Island 지나치는 순간부터 이미 달라집니다.